나는 당신이 그려낸 좋은 사람은 아닙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피곤한 것은 '상대방이 가진 의외의 모습을 바라보는 개인의 태도'에 있다. 우리는 보통 첫인상을 통해서, 이야기를 나누며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그려나간다. 그리고 아직 알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에 대하여는 지난 경험에 비추어 가늠한다. 그런데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싶어 선택한 이 '가늠'이란 방법은 가끔 갈등의 기원이 된다. 왜냐하면 가늠에서는 예상치 못한 변수가 꽤 있음에도 상대방이 좋으면 그 변수에 주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변수가 갑자기 두각을 드러낼 때, 각자의 반응은 갈등으로 번진다.
최근에 한 인간관계를 정리했다. 독일에서 지인 A를 통해 알게 된 사람(이하 'B'라고 칭함)으로 몇 번 얼굴 보고 밥 먹은 게 전부라 그다지 친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서 정리 하기로 결정을 내리는 것에 큰 어려움은 없었고 오늘 드디어(?) 이 관계의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평소에 B가 하는 이야기에서 납득이 잘 안 되는 게 많았지만 그냥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게 아니어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굳이 짚지는 않았다(예를 들고 싶은데 정말 흘려들은 바람에 기억나는 게 없네 ㅎ..ㅎ). 그러던 중 하루는 백신 부작용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 역시 그 사람만의 사정이 있으니까 별말 안 하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오늘 단톡방에서 '이번 정부가 백신의 부작용을 감추려고 하는 것 같다'는 꼰대의 전형적 무논리 멘트를 듣고야 말았다.
솔직히 처음 봤을 때는 또 그냥 하는 소리겠거니 하며 읽씹을 했다. 그러다가 문득 '하.. 여태 한 귀로 듣고 흘렸던 모든 그 말들을 용인해버린 바람에 결국 여기까지 와버렸구나' 싶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도 상대방이 가늠하지 못했던 대답을 했다. 그런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반대 사례도 많이 알고 있고 주변 사례 2건 가지고 말하는 건 단편적인 거라고.
혹자는 이런 것도 그냥 넘어갈 수 있지 않겠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 같다. 맞아 그럴 수 있지. 그리고 솔직히 나는 정치적 견해가 강하지 않고 크게 관심도 없다. 그래서 저런 말들도 매번 하는 소리겠거니 싶고 넘어갔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아마 대선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렇겠지) 뭐가 되었든 맥락 없이 정부 탓을 하는 그 무식함이 정도를 넘어섰고 그에 질려버렸다.
아무튼 B가 생각하지 못했던 나의 의외의 모습에, 뻔한 B의 대답이 돌아왔다. '의견도 중요하고 사실도 중요하지만 이럴 땐 그냥 편들어주는 게 좋겠다'며 자기가 먼저 물고를 틔웠지만 '길게 이야기하지 말자'는 식의 전형적 꼰대 멘트가 이어졌다. 예상한 답이기도 하고 앞서 말한 것처럼 정치 역시 당장 나에게 중요한 주제는 아니어서 다시 '한귀듣한귀흘'모드로 알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앞으로 자기 기분이 안 좋으면 내 의견이나 사실은 어찌 되었든 간에 입꾹닫 하고 자기 장단에 맞춰줘야 한다는 것에서 굉장한 피로감이 밀려왔다. '나의 소중한 시간을 왜 그런 사람의 헛소리에 장단이나 맞추며 피곤해지는 데에 낭비되어야 하지?'와 같은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좀 생각해보다가 단톡방을 나왔다. 물론 B를 소개해준 A의 입장에서는 이게 예의 없다 생각할 수 있고 그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고 저쩌고 이야기를 늘어나 봐야 어차피 다 의미 없는 이야기인걸. 다시는 볼 생각 없는 사람들에게, 굳이 글을 써가며 바뀌지도 않을 마음에 호소하고 싶지 않았다. 그랬더니 얼마 후 A가 연락이 와서는 당황스럽다부터 시작해서 별의 별말을 늘어놓았다. '실망을 했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의가 아니네', '때로는 둥글게 살아야 하네' 등등 자신이 생각하는 상태로 돌려놓기 위하여 갖가지 말을 했지만 애석하게도 '우리가 서로 안 맞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비켜갈 순 없었다. 무슨 감정이든 본질적으로는 그 사람이 느끼는 모든 감정은 내가 그 사람이 생각하는 사람이 아닌 것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냥 나는 상대방이 생각한 그런 좋은 사람이 아닌 거고 그걸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지. 상대방의 모습을 수용할 수 없다면, 그 대신 관계의 종말을 수용하면 된다. 그게 순리다.
입시미술을 하면 보통 아그립파를 입문으로 많이 그리는데, 참 신기하게 같은 걸 보고 그리는데도 각자의 아그립파 속에 자기 얼굴이 묻어나 다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우리가 상대를 바라보는 방법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을 보는 건 나를 투영해서 보는 거고, 그렇기에 실제는 다를 수 있다는 걸 항상 기억해야 한다. 아그립파는 그저 아그립파인걸.